목차
시원도 놀란 김대중 납치사건과 용금호 미스터리의 최종 기획자는?(역사저널 그날)
역사저널 그날'이 김대중 납치사건과 용금호 미스터리 그리고 동교동 자택에서 가진 기자회견 당시, 김대중의 육성을 입수해 베일에 싸여있던 그날 129시간 미스터리를 밝혀본다고 합니다.
10일 방송되는 KBS1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굴욕적인 장면이 되어버린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한 모든 것을 살펴본다.
◆대한민국 야당 지도자 김대중 납치되다
1973년 8월 8일 낮 1시 일본 도쿄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서 김대중이 납치되었습니다.
백주 대낮에 토교 시내 한복판 호텔에서 대한민국 야당 지도자를 누가, 왜, 어떻게 납치한 것이었을까요?
충격적이게도, 김대중을 납치했던 사람들은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의 공작원들. 김대중이 풀려난 직후 동교동 자택에서 가진 기자회견 당시의 김대중의 생생한 육성을 입수해 베일에 싸여있던 그날 129시간 미스터리를 '역사저널 그날'에서 복원한다고 합니다.
이번 방송에서는 김대중이 풀려난 이후 한 기자회견 육성 영상을 공개한다고 해 많은 분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데요.
그래서 오늘은 김대중의 일생에 대해 납치사건 이전까지 정리해보는 인물탐구를 준비했습니다. 추가로 납치사건에 대한 간단한 요약도 추가했으니 궁금한 점 푸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지금 시작하겠습니다.
김대중 전대통령은 1924년 1월 6일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에서 아버지 김운식과 어머니 장수금(후에 장노도로 개명)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시기를 보시면 알 수 있 듯 당시는 일제시대였는데요.
시대의 특성상 당시에는 본처와 후처(첩)개념이 있던 시기였습니다.
김대중의 어머니 또한 김대중이 태어날 당시까지는 첩이었으나 나중에 아버지가 본처와 이혼하며 본처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김대중은 목포 공립상업학교 취업반에 수석입학하였다가 진학반으로 옮겨 졸업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는 창씨개명도 하게 되는데요. 김대중의 창씨개명 당시 이름은 도요타 다이쥬였다고 합니다. 도요타 다이쥬에서 다이쥬는 대중이며 도요타로 개명한 이유는 현재까지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광복 이후에는 여운형 선생과 함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서 공산주의계열 정당, 조선신민당의 조직부장으로 활동했으나 소련을 추종하는 일당들과의 노선 갈등으로 탈당하게 됩니다.
그리고나서 6.25전쟁 직전까지는 목포에서 목포해운공사를 차려 사업에 뛰어들었으나 전쟁 당시 자본가로 몰려 인민군에 처형당할 뻔했다고 합니다.
이후에는 첫 번째 아내를 만나 결혼(이희호여사는 재혼한 부인)하게 되었는데요.
이 때 장인의 권유로 한민당에 입당하여 활동하며 목포일보를 인수, 사장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언론인과 정치관련 일을 함께하는 사람들의 장래가 그렇듯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 당선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듯 여러차례 국회의원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67년 신민당의 창당에 참여, 3년 뒤 제7대 대통령선거의 신민당 후보로 나서게 됩니다.
당시 김대중의 모토는 40대 기수론이었는데요. 40대 기수론을 쉽게 말하면 젊은 정치인들의 적극적인 개혁을 통한 새바람을 불어넣자는 움직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40대 기수론을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40대 기수론을 평가할 때 흔히 '정치적으로 미성숙하다', '아직 생각이 너무 어리다' 등의 이유를 주장하는데요. 저 또한 개인적으로 40대 기수론을 반대합니다.
이는 40대의 경우 아직 사회적으로 안정될 나이가 아닐 뿐더러 가정에 아직 책임져야할 자녀가 있을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자녀의 대입문제, 군대 문제, 금전 문제 등등 부정부패가 만연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요즘 언론을 자주 접하시는 분들은 쉽게 공감 가능하실거라 생각합니다.
김대중은 아쉽게도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95만표의 얼마 되지 않는 표차로 낙선하게 되었고 이에 장기 집권을 노리던 집권세력의 눈엣가시로 지목됩니다.
그럼에도 김대중은 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고 이로 인해 투옥을 비롯한 탄압을 받게 됩니다.
◆용금호 미스터리, 납치의 목적은 살해인가? 경고인가?
공작단에게 납치되어 끌려가 손발이 묶이고 눈이 가려진 채 중앙정보부의 공작선 용금호에 감금된 김대중. 공작원들은 그의 오른 손목과 발목에 수십 킬로그램짜리 돌을 매달고는 ‘던질 때 풀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라’라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추후 밝혀진 공작 계획안 관련 증언에 따르면, 야쿠자를 이용해 김대중을 납치해 데려오는 것과 암살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는데요.
그런데 공작원들이 납치했던 김대중을 의사의 진찰을 받게 한 후 서울 동교동 자택 앞까지 데려다줬다? 김대중 납치의 목적은 살해인가, 경고인가? 그날의 생생한 증언을 '역사저널 그날'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납치사건의 배후는?
대한민국도 아닌, 일본에서 야당의 지도자인 김대중이 중앙정보부에게 납치됐습니다.
유신체제 하에서 해외로 나가 거의 유일한 반유신 활동을 했던 김대중. 강경한 수사를 하겠다는 입장이던 일본이 갑자기 납치사건 수사를 흐지부지 마무리하기에 이르렀고, 한국의 모 재벌이 다나카 수상에게 4억 엔의 정치자금을 제공했다는 소문까지. 납치 사건의 최종 기획자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납치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대한민국은 고개를 숙여 일본에게 사과했고, 국제적으로 깡패국가로 낙인찍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뉴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엄홍길, 박무택부터 박영석까지…산악 동료 죽음 속 유서 쓰기도 (0) | 2020.11.11 |
---|---|
윤석열 대권지지율 첫 1위…이낙연·이재명 제쳤다 (2) | 2020.11.11 |
네이버 제페토, JYP엔터서 50억원 투자 유치 (0) | 2020.11.09 |
원주 코로나19 확진자 3명 추가 발생 (0) | 2020.11.08 |
희귀종 검은 호랑이 '사진 찰칵'…인도 정글서 어슬렁 (0) | 2020.11.06 |